배너 닫기
위로위로 홈

[룩 인 더 올림피아10] 덱스터 잭슨 ‘20번의 도전, 단 한 번의 우승’

등록일 2020.01.30 15:59 youtube instagram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쪽지신고하기 URL복사 공유하기


▲ 사진=덱스터 잭슨 인스타그램 

 

[개근질닷컴] 폼은 일시적이나 클래스는 영원하다

 

덱스터 잭슨(Dexter Jackson)만큼 이 말이 어울리는 보디빌더가 있을까? 덱스터의 첫 올림피아 도전은 2000년도였다. 당시를 지배했던 로니 콜먼, 제이 커틀러 등 일류 보디빌더들은 이미 다 은퇴 후 오직 후배 양성에 기여하고 있다.

 

그는 2008년 단 한 번의 올림피아 우승 이후 다시 정상에 오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올해 49살 덱스터 잭슨은 변하지 않은 기량으로 2019 올림피아에서 브랜든 커리, 윌리엄 보냑, 하디 추판 등 떠오르는 별들과 당당히 우승 경쟁을 펼쳤다.

 

2008년 덱스터가 우승할 수 있었던 ‘최상의 폼’은 일시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클래스는 아직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분명 덱스터와 함께 운동을 시작했던 보디빌더들의 레이스는 끝이 났다. 반면, 그 누구보다 긴 레이스를 뛰고 있는 덱스터 잭슨. 그의 종점은 어디일까?   

 

덱스터의 어린 시절

 

덱스터 잭슨은 1969년 11월 25일 플로리다의 잭슨빌(Jacksonville)에서 태어났다. 6명의 형제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형제 중 단연코 가장 활동적이고 활발했다. 고등학교에 진학 후에도 그의 남다른 운동신경은 또래 학생 중 가장 돋보였다. 40m 단거리를 4.2초에 완주할 정도로 육상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덱스터는 학교 미식축구부에서 러닝백 포지션을 맡아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했다.

 

덱스터의 능력은 미식축구에서만 발휘된 것이 아니다. 브레이크 댄싱에서도 재능을 보였고, 취미로 한 가라데로는 검은띠 4등급을 거머쥐었다. 이처럼 그의 운동신경은 어떤 종목에서든 빛이 났다. 장차 스포츠 스타가 재목이었다.

 

하지만 대학 입학을 앞두고 얘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 바로 여자친구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결국 덱스터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정, 아파트에 입주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 1999년 덱스터(왼쪽). 사진=덱스터 잭슨 인스타그램 

 

드디어 발견한 ‘최고의 재능’

 

덱스터의 장기는 ‘타고난 운동신경과 유전적으로 월등했던 근육 프레임’이었다. 일에 매진하던 그를 지켜본 친구들은 어느날 보디빌딩 지역 대회에 나가보라는 제안을 한다.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던 덱스터는 곧바로 체육관을 다니며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단 3주 동안 준비를 마친 덱스터는 지역 대회에 참가해 우승을 차지한다. 자신의 ‘잠재력과 재능’을 그때 깨달았다. 덱스터는 본격적으로 보디빌딩에 입문하기로 맘을 먹는다. 그의 나이 20살 때 일이었다.

 

프로 보디빌더가 되기 위한 준비  

 

첫 지역대회에서 우승한 덱스터는 쇠질에 더욱 매진했다. 프로 보디빌더란 타이틀을 위해 밤낮으로 훈련에 임한 것이다.

 

이후 작은 지역대회는 가볍게 휩쓸었다. 그리고 1992년 남부에서 열린 NPC Southern States Championship에서 3위라는 성적을 얻으며, 보디빌딩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다.

 

그로부터 3년 후 덱스터는 더 발전된 기량으로 NPC USA Championships에서 라이트 헤비급 1위를 거머쥔다. 2년 뒤 1998년에는 North American Championships에서 라이트 헤비급 1위와 대회 오버롤의 주인공이 된다. 압도적인 프레임과 데피니션, 프로 카드를 획득할 수밖에 없는 근질이었다.

 

그때도 덱스터는 자신이 ‘차기 올림피아’의 자질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주변에 내가 세계 정상에 설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근데 그런 말들이 내겐 오히려 동기부여가 되어 돌아온다. 더 독하게 훈련하고, 노력해서 발전된 모습을 선보이게 된다”

 


▲ 20대 초반 덱스터. 사진=덱스터 잭슨 인스타그램 

 

Grand Prix England

 

프로에 데뷔한 덱스터는 프로 무대의 벽을 실감한다. 프로 데뷔 이후 2002년까지 18개의 대회를 뛰었지만 단 한 군데도 우승하지 못했다. 상위 성적은 계속 유지했지만 프로의 벽은 너무 높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한 덱스터는 2003년 ‘Grand Prix England’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 프로 데뷔 4년 차에 거머쥔 첫 우승이였다. 드디어 포텐이 터진 그의 존재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미스터 올림피아 3위, ‘Show of Strength Pro Championship’ 1위 등 미국 전역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덱스터는 더 이상 단순 유망주가 아닌 올림피아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는 유명 보디빌더가 된다.

 

당시 미국의 한 기자가 갑자기 올라온 기량의 비법을 묻자 덱스터는 이렇게 대답했다.

 

“4년 전에 프로 카드를 땄다. 이후로 가벼운 중량을 들어 본 적이 없다. 항상 내가 들 수 있는 최상의 무게로 훈련한다. 초창기 가장 무거운 무게의 벤치를 4-5번 했다면 지금은 12번에서 많게는 15번까지한다. 이게 내 비법이다”

 

▲ 20대 초반과 현재의 덱스터. 그의 쇠질은 멈추지 않았다. 사진=덱스터 잭슨 인스타그램 

 

단 한 개의 올림피아 트로피

 

아놀드 클래식(Arnold Classic)에선 ‘전성기의 덱스터’를 막을 수 있는 선수가 없었다. 2005-06, 2008 아놀드 클래식 우승 그리고 2007 IFBB Australian Pro Grand Prix, 2008 IFBB Australian Pro Grand Prix VIII까지 월등한 기량으로 트로피를 휩쓸어 갔다.

 

그동안 올림피아 도전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챔피언 타이틀을 놓고 우승을 경쟁하던 두 괴물 제이 커틀러와 로니 콜먼에게 밀려 3위 혹은 4위에만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마침내 덱스터는 2008년 '로니 콜먼 은퇴 후 한동안 제이 커틀러'가 지배할 것 같았던 올림피아에 역대급 근질로 나타나 커틀러의 3번째 올림피아 우승을 저지한다.

 

“그때의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 당시 내가 봐도 믿을 수 없는 기량으로 커틀러의 우승을 막고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소름 돋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안타깝게도 덱스터는 2008년 이후 다시 올림피아 정상에 서지 못했다. 이듬해 다시 돌아온 커틀러는 단점없는 기량으로 덱스터를 제치고 올림피아 정상에 복귀했다.

 


▲ 2008년 제이 커틀러와 덱스터 잭슨. 사진=덱스터 잭슨 인스타그램 

 

전설은 진행 중

 

한번의 우승으로 그쳤던 덱스터지만 2020년 현재 그는 보디빌딩 역사에 무수한 기록을 남겼다. 우선 29번의 IFBB Pro 타이틀을 차지한 것과 2019년까지 올림피아에 20번 출전한 최초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지난해 올림피아 4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덱스터의 올해 나이는 49살이다. 2000년도 전성기를 함께 한 선수들은 더 이상 은퇴하고 없지만 그의 역사는 현재 진행중이다. 덱스터의 은퇴는 현재 그의 기량으로 보아 10년이 더 걸릴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를 멈춰 세우는 건 세월이 아니라 그의 열정이 꺼지는 때일지도 모르겠다.

 


▲ 2019 덱스터 잭슨. 2019 올림피아 4위가 전혀 놀랍지 않은 49세의 모습. 사진=덱스터 잭슨 인스타그램 

허준호 (hur.jh@foodnamoo.com) 기자 
<저작권자(c) 개근질닷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기사등록 2020-01-30 15:59:07 
허준호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올려 0 내려 0
관련뉴스 더보기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유료기사 결제하기 무통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할 금액은 입니다.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가장 많이 본 뉴스

종합 보디빌딩 연예 스포츠 건강

GGJ 유튜브 더보기

핫이슈 더보기

핫피플 더보기

커뮤니티 더보기